생체모사와 정밀분석기술을 마이크로칩에 접목한
혈전증 조기진단기술 개발
고려대학교 기계공학부 신세현 교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바이오 분야에 기계공학 기술을 접목한 ‘과학자기술자’인 고려대학교 기계공학부 신세현 교수. 생체모사와 정밀분석기술을 마이크로칩에 접목하여 혈전증의 위험정도를 조기에 진단하는 기술 개발로 주목을 받은 그는 혈관구조와 유동현상을 모사하고 혈소판의 활성화와 응집에 따른 혈전증 발생 가능성을 일회용 마이크로칩 위에서 간단히 검사하는 원천기술과 실용화 기술을 개발해 진료 현장에서 손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의학계의 아이디어와 공학계의 기술을 융합시켜 우리나라 의료계와 의료기기 산업이 발전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신세현 교수를 만나보았다.
의학과 공학의 융합은 기술혁신의 원동력
심장병과 뇌졸중 등 혈관질환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제1의 사망원인으로 현대인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서구화된 생활패턴으로 혈관질환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이다. 전통 기계공학인 열전달 분야를 전공하고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부터 바이오 융합 쪽에 관심을 갖게 된 신세현 교수는 오래 전부터 이러한 추세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본격적으로 혈액 실험에 뛰어들었다. 이때부터 신 교수의 꿈인 기계공학과 의학의 융합이 시작된 것이다.
혈액 분야 중에서도 신 교수가 주목한 것은 혈소판이다. 그는 혈관질환의 기본 원인에는 혈소판의 활성화와 응집력의 변화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과도하게 활성화될 수 있는 혈소판은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활화산과 같아서 경미한 자극에 의해서도 활성화되어 심근경색과 뇌졸중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혈소판의 기능이 과도하게 저하된 경우에는 혈액응고가 발생하지 않아 과다 출혈로 인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과도하게 활성화될 수 있는 혈소판을 가진 환자의 경우, 혈소판의 기능을 차단하거나 억제하는 항혈소판제를 복용함으로 뇌경색 및 다른 혈전성 질환의 발생 빈도를 낮추어 주기 때문에 예방을 하거나 재발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수술이나 치료에 앞서 출혈성 경향을 검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혈소판의 문제 여부를 미리 검사하는 기술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사용하는 기술은 오랫동안 실효성이 없어 임상현장에서는 외면해왔죠. 하지만 해외에서 의학과 공학이 융합되어 새로운 기술혁신을 이루는 사례를 보면서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는 연구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어요.”
신 교수는 혈소판 검사 기술은 혈관 내부에서 높은 전단력에 의해 발생하는 혈전증의 위험도를 일회용 마이크로칩에서 재현하는 기술로 개발해 성공한 글로벌 의료기기업체들은 단숨에 혈소판 복합기능 진단검사 분야에서 전 세계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며 1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며 세계시장 규모를 매년 10% 이상씩 증가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의학과 공학의 융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항혈소판제의 약물반응을 환자별로 검사할 수 있는 일회용 키트를 개발한 미국의 벤처회사는 단번에 독자적인 시장을 형성하며 글로벌 시장을 석권하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기술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끊임없는 호기심과 열정적인 연구가 성공의 비결
‘인체 생명의 신비는 혈액 속에 있다’라는 기본적인 생각으로 연구에 임해 온 신 교수는 의학과 공학의 융합을 풀 첫 번째 열쇠이자 출발점으로 ‘혈소판’을 선택했다.
“의학과 공학의 융합과 더불어 연구에 일생을 다 바쳐서 혈액의 신비를 푸는 것이 제 꿈이에요. 그 꿈의 핵심 요소가 혈소판인데요, 실험을 하면서 수많은 실패도 했지만 밤늦도록 연구원들과 함께 혈소판에 대한 연구를 한 노력들이 좋은 결과를 얻게 해준 것 같아요.”
혈액 속 혈구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혈구인 혈소판을 초순도로 분리하는 방법을 개발한 신 교수는 혈소판 기능과 약물반응 검사를 현장에서 5분 내로 실시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다. 이 기술은 압전판 양쪽 전극에서 발산한 초음파 진동으로 혈액에서 혈소판만 완전히 분리하는 것으로, 신 교수는 양쪽에서 만난 초음파가 만들어낸 표면탄성파의 힘이 백혈구와 적혈구, 혈소판 등을 크기순으로 밀어낸다는 점에 착안해 개발하게 된 것이다. 이 기술은 심장병이나 뇌졸중 등 뇌심혈관계 질병을 조기 진단하는 데 적용할 수 있다. 올해 말이나 늦어도 내년 초쯤에는 다른 제품과 비교 가능한 임상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현재 시제품을 제작했지만 등록과 승인 절차를 감안하면 상용화까지는 3년 정도의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제품화에 성공하게 되면 신 교수는 해외시장에도 진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의료기기 분야는 국내 시장이 작기 때문에 무조건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품화에 대해서는 연구자가 주도하는 형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처럼 혈전증 조기진단 기술에서 성공적인 연구 결과를 얻었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번 연구를 하면서 실패도 하고 한창 고민을 할 때, 제가 혈소판이 되어 혈관 속을 돌아다니면서 가상으로 시뮬레이션을 하는 꿈을 꿨어요. 그 꿈이 이번 연구의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게 해주었죠. 박사과정 때부터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지금도 머리맡에는 메모지와 필기도구를 놓고 잠을 잡니다.”
그는 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예상하고 설계한 대로 결과를 얻는 순간도 있었지만, 다음에 재현이 안 되어서 고생을 한 적도 많았다. 우연히 예상대로 결과를 얻은 후 다시 동일한 결과를 얻기 위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실험을 반복하면서 고생을 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신 교수는 잠을 잘 때면 혈액에 관한 꿈을 꾸면서 꿈속에서도 실험을 했다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실험은 실패할 수 있어요. 그러나 연구자는 결코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연구라는 영어 단어가 ‘리서치(re-search)’ 즉 다시 찾고 또 찾아보는 것이라고 할 때 연구자는 계속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계속 찾아야 하는 직업이고, 좌절하는 연구자는 그것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연구가 처절하게 실패로 나올 때는 좌절할 것이 아니라 ‘왜’라는 끊임없는 질문과 연구원들과의 아이디어 도출 회의를 통해 도전하고 또 도전해 성공을 얻어내야 합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까지 여러 번의 실패를 통해 신 교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예측으로는 절대 되지 않고 오직 실험으로만 얻어진다는 것, 그리고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계획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앞이 보이지 않고,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을 때는 어렵고 힘들지만 그 고비를 넘어선 순간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연구가 시작되면 퇴근하는 것도 잊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어제 덮어뒀던 연구를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에 내일 아침이 기다려진다고 고백하는 그는 처음 연구자의 길을 들어설 때의 설렘과 열정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공정한 이익 공유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목표
선진국에 비해 학문과 기술 간의 융합을 늦게 시작한 국내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신 교수는 혈소판의 기초연구를 다년간 임상의와 공동 수행해왔다. 그 결과 생체 혈관 구조 및 유동 특성을 마이크로칩에 모사하고 구현하는 독자적인 기술개발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 개발의 핵심 요소로서 미세교반기의 회전유동을 통해 발생하는 전단력을 이용하여 전단력 유도 혈소판 활성화(shear-induced platelet activation)에 대한 원천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더불어 활성화된 혈소판이 상처에 노출된 혈관에 부착되고 혈관이 막히는 현상을 마이크로칩에 구현하는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혈소판의 기능과 약물반응에 대한 지표로서 혈관을 모사한 미세채널을 따라 흐르는 혈액이 막힐 때까지의 이동하는 거리를 개발하고 이를 간단히 영상으로 측정하는 방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데 성공해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먼저 국내 특허로 출원된 후 고려대학교 산학협력단의 우수 특허로 선정되었다. 또한 PCT 국제특허 출원과정을 거쳐 미-일-중-EU 등의 국가에 개별 출원 지원과정을 거쳐 등록절차를 밟고 있다. 또한, 이 연구결과는 국제적인 학술지인 와 , 등에 발표되었다. 이러한 특허기술은 의료기기 전문기업으로 기술 이전되어 상용화 기술로 연구개발 중에 있기도 하다. 특히, 이 기술은 글로벌 의료기기업체들과의 본격적인 기술경쟁을 위한 독자적 원천기술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고, 높이 평가되고 있다. 기존 선진국 기술의 혈구수치 및 특정 인자에 종속적인 단점이 보완될 뿐 아니라 검사의 반복재현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학계와 산업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저는 과학자가 아닌 ‘과학기술자’입니다. 기계공학과 의학 간 융합 연구를 만난 것이 저에겐 운명과 같은 일이에요. 의학계의 아이디어와 공학계의 기술을 더 많은 분야에서 접목할 수 있도록 공정한 이익 공유 시스템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한국의 공학기술 수준은 의학 쪽 수요만 안다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기계공학과 의학 간 융합 연구, 융합에 소극적인 두 분야가 손을 잡는다면 우리나라 의료기기 산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끊임없이 호기심을 갖고 도전하는 연구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신뢰가 융합연구의 핵심
의학과 공학의 만남에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는 신세현 교수는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기계공학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드렉셀대학교 대학원에서 생체유체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그 후 미국 네바다대학교 리노캠퍼스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경북대학교를 거쳐 현재는 고려대학교 기계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학문 융합의 시대를 맞아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분야의 과학을 융합하는데 성공했다. 기계공학의 핵심기술인 유체역학을 임상현장의 의학적 필요에 접목하여 혈소판의 기능 및 약물반응 검사에 대한 신개념 원천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그는 융합 연구에 열정을 보이며 융합에도 체계와 순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융합 연구 과정에서 한 번 실패를 겪은 적이 있어요. 보유한 기술 위주의 의료기기를 개발했다가 임상현장에서 외면당하는 경험을 통해 소중한 것을 배우게 되었어요. 의료기기는 임상현장에서 필요한 것, 그리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미충족 임상 수요 기술을 개발해야 실용화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된 거죠.”
의료기기는 임상적 수요가 기술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말하는 신 교수는 체계적으로 학문과 기술을 융합하기 위해서는 연구자들의 세심한 이해,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 신뢰가 필수라고 강조한다.
“융합연구의 핵심은 상대를 배려하는 공동연구예요. 아무리 훌륭한 연구자끼리 뭉쳤더라도 서로 욕심을 내고 융합의 결과를 자기의 것으로만 한다면 공동연구의 성과와 의미는 없겠죠. 융합연구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시스템적으로 분명한 이익 공유에 대한 약속과 신뢰가 담보되어야 비로소 성공적 융합기술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융합연구를 지향하는 연구자이기 때문인지 신 교수는 좋은 연구자들과 함께 런치 타임을 가지며 지금 하고 있는 연구에 대해 논의도 하고 소소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며 활력을 얻는다. 이런 시간들이 연구자의 길을 걷는 신 교수의 원동력이다.
이러한 마음자세로 융합연구를 주도해 온 신 교수는 공학교수로서 임상의와 의과학자가 주도하는 혈유변학(hemorheology) 분야의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었다. 또한, 그의 열정과 노력으로 3년에 한 번씩 대륙을 이동하며 개최되는 혈유변학 국제학술대회를 최초로 한국에 유치하는 기회를 얻게 되어 올해 5월에 신 교수가 재직하는 고려대학교에서 개최되었다. 신 교수가 개발한 기술은 미래융합기술로 선정되어 제품화 기술로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실용화가 이루어질 전망이다. 향후 3년 이내에 글로벌 의료기기 업체들과 경쟁할 수 있는 신개념 혈소판 진단검사 의료기기가 탄생할 것으로 보인다.
연구에서 성과를 얻을 때 성취감을 느끼고, 연구생원들과 새로운 아이디어 찾아내고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는 신 교수는 현재 혈소판과 같이 마이크로 크기(100만분의 1m)를 넘어 나노 크기(10억분의 1m) 입자까지 분리하는 기술도 연구 중이다. 또, 아직 풀리지 않은 혈소판에 대한 무궁무진한 연구 과제들을 하나씩 풀어갈 계획이다.
<이 기사는 사이언스21 매거진 2015년 6월호에 게재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