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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율리 교수


 

섭식장애 연구의 불모지, 희망을 꽃피우다
사랑 호르몬 옥시토신의 거식증 치료가능성 규명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율리 교수

 



 

가느다란 허리와 마른 다리, 이른바 ‘44 사이즈’의 그녀들. 깡마른 몸매가 선망의 대상이자 미(美)의 기준이 되어버린 이상한 현실 속에서 오늘도 많은 여성들은 날씬함이라는 환상을 쫓고 있다. 하지만 마른 몸매를 향한 열망은 때로 집착이라는 마음 속 괴물을 만들며, 음식을 거부하는 상황까지 몰아가기도 한다. 이러한 거식증은 정신질환 중 치사율이 가장 높은 질환이지만, 현재 마땅한 치료제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최근 거식증 환자들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백병원 김율리 교수 연구팀이 옥시토신의 거식증 치료가능성을 입증한 것이다. 이번 연구결과는 전 세계 주요 언론에 보도되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치명적 질환 거식증, 치료의 길을 열다
여러 매체를 통해 형성된 과장된 신체기준에 스스로를 맞추려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살이 찔까봐 두려워 음식을 마음껏 먹지 못하는 섭식장애 환자 또한 증가하고 있다. 섭식장애는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체중.;체형에 대한 집착 때문에 비정상적인 체중 감량에 나서는 병이다. 즉, 외모지상주의적 분위기와 관련된 선진국형 질환이라고 할 수 있다.
“섭식장애는 정신적.신체적 건강이 함께 악화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환자들이 자신의 상태를 감추기 때문에 주변에서 인지할 정도가 되면 이미 건강상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식증은 10대 여학생 약 150명 중 한 명에게 발병하는데, 특히 청소년에게 섭식장애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10~20대 거식증 환자는 저체중 및 자살로 인해 또래보다 사망가능성이 12배가 높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03년 정신질환예방보고서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치료·예방해야 할 청소년 정신질환의 하나’로 거식증을 선정, 그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거식증 환자들은 음식, 체중과 관련된 문제 외에도 불안 등 정서문제와 사회성까지 악영향을 받는다.

 

 



“거식증 환자들의 사회성 문제는 발병 전인 10대 초반부터 나타납니다. 사회성 문제는 고립을 초래하고 이는 거식증의 발병뿐 아니라 병의 유지에 주요요인입니다. 연구팀은 환자 내면의 이러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춰 옥시토신을 거식증의 잠정적 치료제로서 그 가능성을 탐색했습니다.”
옥시토신은 출산, 수유, 사랑 등 애착과 관련된 행동 시에 자연스럽게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많은 정신질환의 치료제로서 가능성이 타진되고 있는데, 특히 자폐증 환자들에게서 사회불안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김율리 교수와 영국 런던 킹스칼리지 Janet Treasure 교수 공동연구팀이 사랑 호르몬으로 알려진 옥시토신으로 거식증 환자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음을 입증, 치료의 가능성을 열었다.


연구팀은 31명의 거식증 환자와 33명의 정상인들을 대상으로 옥시토신 혹은 위약을 비강스프레이로 투여했다. 이후 참가자들에게 음식(저칼로리, 고칼로리), 체형(마른 체형, 살찐 체형), 체중 에 관련된 사진들을 화면으로 보게 하고, 참가자들이 사진에 반응하는 데에 걸린 시간을 측정했다. 부정적인 사진에 주의가 가 있을 경우 더 빨리 반응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옥시토신 투여 후 거식증 환자들에게서 음식 사진 및 살찐 신체부위 사진에 대한 주의편향이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옥시토신 효과는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거식증 환자에서 더 두드러졌다.
두 번째 실험으로 동일한 참가자들에게 옥시토신과 위약을 투여하고, 이번에는 분노, 혐오, 행복과 같은 얼굴표정에 대한 반응을 측정했다. 그 결과는 옥시토신 투여 후 거식증 환자들에게서 혐오 표정에 대한 주의편향이 감소하고, 분노 표정에 대한 회피가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옥시토신이 거식증 환자의 음식, 체형 등에 대한 주의 경향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아직 참여 환자수가 적어 연구가 초기단계이지만, 이번 연구가 그동안 적합한 치료제가 없어 고통 받아 온 거식증 환자들을 위한 치료제 개발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추후 옥시토신의 치료적 유용성을 입증하는 연구들의 중요한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번 연구결과는 지난 3월 13일 정신신경내분비학(Psychoneuroendocrinology) 온라인판 및 3월 7일 온라인 과학학술지 미공공도서관저널(PLOS ONE)에 소개되었다. 특히 영국 BBC news 및 BBC World Service, 영국 The Times, 미국 TIME, 로이터연합통신 등 세계 주요 언론에 연구결과가 보도되며 큰 주목을 받았고, 국내 언론에도 보도되며 연구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이어갔다.

 

 




거식증의 진단과 치료방법 개발 실마리
김율리 교수는 옥시토신의 거식증 치료가능성을 입증한 이번 연구 외에도 여러 괄목할 만한 연구성과를 내놓으며, 국내 섭식장애 연구의 선구자로서 외길을 걸어왔다. 특히 옥시토신에 관해서는 세계적 수준의 활발한 연구활동을 펼쳐 왔다. 앞서 지난 2월에는 인제대 인당분자생물학연구소 김정현 교수와 함께 거식증과 옥시토신수용체(Oxytocin receptor, OXTR) 유전자와의 연관성을 규명한 바 있다.
연구팀은 거식증의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 작용을 규명할 수 있는 유전자로 옥시토신 수용체 유전자에 주목하고, 이 유전자의 methylation level의 차이를 거식증과 정상대조군에서 분석.비교했다. 그 결과 거식증 환자의 옥시토신 수용체 유전자의 발현을 감소시키는 부위의 methylation level이 정상인에 비해 뚜렷하게 감소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 연구결과는 거식증이 후천적으로 유전자의 기능 발현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변화한 유전자의 기능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시사합니다. 이는 거식증의 치료방법을 개발하는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연구결과는 2월 11일 온라인 과학학술지 미공공도서관저널(PLOS ONE)에 게재되었다.

 

 






 


섭식장애 치료를 향한 가치 있는 발걸음
이처럼 김율리 교수는 섭식장애 분야의 연구를 집중적으로 수행하며, 국내에서 관련 분야 치료기술 발전과 교육을 선도하고 있다. 2008년에는 섭식장애의 올바른 치료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2008 국제 섭식장애학회 총회’에서 '임상장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또한 국제정신의학회에서 한국 정신과의 대표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WHO의 정신질환 진단기준 개정 과정에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정신의학 전문가들과 함께 작업해 오고 있다. 그 결과를 세계정신의학회 등에서 활발히 발표해 왔다.
한편, 김율리 교수는 섭식장애의 올바른 치료방법에 대해 정확히 알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섭식장애는 만성화되기 되기 쉬운 질환이며, 만성화된 섭식장애 환자들의 20%는 정신적.신체적으로 쇠약해져 전적으로 가족에 의존해 살게 됩니다. 거식증 환자가 가족이면 전가족의 삶이 피폐해집니다. 이처럼 거식증의 경우 만성화, 난치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치료는 의료복지의 사각지대에 있습니다.”
수십년 이상 된 심각한 저체중인 거식증은 희귀하고 난치성 질환이지만, 조현병(정신분열병)처럼 산정특례 대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또한 만성적이고 오래된 거식증 환자들은 독립생활이 불가함에도 정신장애인에 등록되지 못한 채 고립되어 방치되어 있다.

 

 




“섭식장애로 인한 이차적 합병증의 치료는 민간의료보험에서 보장되지만, 오히려 섭식장애 자체는 민간보험에서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에 병명을 숨기고 입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섭식장애 치료를 위한 건강보험정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가족 중 한 사람이 거식증에 걸려 만성화되면 웬만큼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가정은 가족 전체가 경제적으로 곤궁해 집니다.”
아울러 김율리 교수는 서구 선진국들에서는 섭식장애로부터 여성과 청소년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인 반면 국내의 경우 아직 사회와 대중들의 인식변화는 미미한 상황이라며, 섭식장애에 대해 가정과 미디어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청소년시기의 섭식장애는 뇌발달과 신체성장에 치명적인 만큼 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대학병원 유일의 전문치료기관 ‘섭식장애 클리닉’
김율리 교수는 현재 대학병원 유일의 섭식장애 전문치료기관을 이끌고 있다. 섭식장애에 대한 인식이 미미했던 2005년 처음 문을 열었던 섭식장애 클리닉은 많은 거식증 환자와 가족들의 희망이자 섭식장애 치료의 버팀목으로 자리매김 했다.
김율리 교수는 세계적으로 섭식장애 치료를 선도하는 런던 모슬리 병원과의 교류를 통해 다각적 접근법(multidisciplinary approach)을 적용해 섭식장애의 인지행동치료, 다가족치료, 인지교정치료 등을 도입, 선도적인 수준의 치료를 소개했다. 아울러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 임상 각 과와의 유기적 협진을 통해 섭식장애의 신체적 합병증에 대해 면밀히 처치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김율리 교수는 전국 및 해외에서 섭식장애 환자들을 의뢰받아 치료해 오고 있다. 한편 2012년과 2013년에는 섭식장애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해 섭식장애 분야 신진인력에 대한 학문적 고취와 교육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척박한 국내 섭식장애 연구 현실, 국가 지원 절실
섭식장애는 가장 생산적이고 중요한 시기인 10대, 20대 여성에서 발병하며 기능손실이 막대하다. 게다가 2세 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초래하는 등 모성건강에도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 이처럼 섭식장애는 개인과 가족들의 삶 뿐 아니라 나아가 국가경쟁력적 차원에서도 심각한 질환이다.
섭식장애의 예방과 치료를 위한 연구가 국익차원에서도 반드시 필요함에도, 국내 섭식장애 연구 환경은 척박하다.
“영국에 유학하며 섭식장애를 연구하던 2002년만 해도 국내에서 이 병에 대한 인식은 미미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은 이 병이 국가 미래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집중적으로 연구비를 투자하고 있었죠. 그 결과 현재 수많은 연구 성과가 예방정책과 치료기술의 개발로 연계되어 청소년과 여성 건강에 큰 향상이 있었고 국가적 이득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섭식장애 분야 연구에 대한 지원에 눈을 돌릴 때입니다.”
지금까지 섭식장애의 예방과 치료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전무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되짚어 봐야할 것이다. 섭식장애가 개인과 가족 뿐 아니라 2세 건강에도 치명적임을 고려할 때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다.


김율리 교수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는 효과적인 치료방법의 개발이다. 거식증은 난치병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선에서 치료방법의 개발에 매진하고 있는 김율리 교수의 노력의 결실로, 머지않아 섭식장애의 획기적인 치료방법 개발 소식을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환자들이 회복되어 가족과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갈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는 김율리 교수는 오늘도 그들을 절망에서 일으키기 위해 진료현장과, 연구실에서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환자들의 아픔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섭식장애 치료를 위해 외길을 걸어온 김율리 교수의 미래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안유정 기자 reporter@s21.co.kr>



<이 기사는 사이언스21 매거진 2014년 5월호에 게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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