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수님 인터뷰] 연세대학교 지구시스템과학과 이기현 교수
  • 물이 얼 때 탄생하는 독특한 광물의 비밀을 풀다 자연수 결빙에 의한 광물 형성 기작 규명

  • 일반적으로 온도가 낮아질수록 화학 반응은 느려지고, 고체 상태인 얼음 내부에서는 용질 간의 반응이 극도로 제한된다. 이 때문에 그동안 지구화학 연구에서 얼음은 화학적으로 정지된 ‘비활성 상태’로 여겨져 왔으나, 최근 물이 얼 때 얼음 결정 사이의 미세한 ‘준액체층’에서 발생하는 동결농축효과가 이러한 통념을 뒤집는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연세대학교 이기현 교수 연구팀은 최근 동결농축효과를 자연수에 적용해, 물의 결빙에 의한 광물의 새로운 형성 경로를 체계적으로 규명해냈다. 상온에서는 침전이 불가능한 불포화 상태의 수용액일지라도, 결빙 시에는 포화도가 수만 배까지 급격히 상승하며 능망간석과 같은 광물이 형성될 수 있음을 세계 최초로 보고한 것이다. 이는 지구의 원소 순환과 탄소순환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간 간과되었던 얼음 내 지화학 반응의 능동적인 역할을 새롭게 조명하는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번 연구는 방사광 가속기를 활용해 물이 얼 때의 광물 형성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측하고, 저온·고농도 환경이 빚어낸 독특한 나노 구형체의 형성 기작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미가 크다.
     

    얼음 속 ‘준액체층’이 빚어낸 새로운 광물 형성 경로 규명

    이 교수는 약 7년 전, 당시 포항공대 재직 중이던 최원용 교수(현 한국에너지공대)와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얼음 화학’이라는 분야에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유기물 관련 보고로 시작된 이 영역은 1980 ~ 1990년대 대기 화학 분야에서 반응 속도 증폭 현상이 확인되며 학술적 토대를 갖췄다. 특히 일본의 다케나카 교수가 얼음 내 산화 반응 속도가 액체 상태보다 10만 배 빨라진다는 결과를 ‘네이처’에 발표하며 연구는 본궤도에 올랐다. 국내에서도 환경공학적 관점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왔으나, 이 교수는 기존 연구를 답습하기보다 지구화학적 관점에서의 새로운 응용 가능성을 모색했다. 
    화학 반응은 온도가 낮아질수록 느려지며 고체 상태인 얼음 내부에서는 용질 간의 반응이 일어나기 어렵다. 이러한 물리적 제약 탓에 그동안 지구화학 연구에서 빙권 내 지화학 반응은 거의 무시되어 왔다. 하지만 수용액이 얼 때 얼음 결정 사이에 얼지 않은 미세한 영역인 ‘준액체층(liquid-like layer)’이 형성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좁은 공간에 수용액 속 거의 모든 용질이 모여 농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동결농축효과(freeze concentration effect)’가 발생하며, 이는 상온에서 불가능했던 화학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핵심 동력으로 작용한다.
    “기존 얼음 화학 연구가 주로 환경 화학적 관점에서 반응 속도의 가속화에 초점을 맞췄다면, 저희는 동결농축효과를 통한 광물 형성에 집중하고자 했습니다. 물이 얼면서 용질의 농도가 급격히 높아지면 광물에 대한 포화도가 상승해 새로운 광물이 형성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고, 실제 실험을 통해 이를 증명해 보인 것이죠.”
    연구팀은 원소 순환과 탄소순환의 핵심 인자인 망간 이온 및 탄산염 이온 수용액을 활용해 영하 5도와 20도 환경에서 동결 실험을 수행했다. 분석 결과, 상온에서는 전혀 침전이 발생하지 않는 낮은 포화도 조건임에도 결빙 시에는 능망간석이 형성되는 현상을 확인했다. 이는 동결 과정에서 능망간석의 포화도가 이론적 수치보다 약 30,000배가량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이번 연구에서는 미국 아르곤 연구소와 국내 포항 방사광 가속기의 X-선 흡수분광분석을 동원해, 얼음 속에서 광물이 결정화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측하는 성과를 거뒀다.
    동결 조건에서 탄생한 광물은 그 구조와 형태에서도 상온 광물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상온의 능망간석이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직육면체 단결정 형태를 띠는 것과 달리, 얼음 속 준액체층에서 형성된 광물은 나노미터 크기의 결정들이 뭉쳐진 구형체로 나타났다. 고농도로 응축된 용질들이 결정핵 형성을 가속하는 동시에 입자 간의 응집을 유도한 결과다. 반면 저온 환경은 이온의 확산 속도를 억제해 결정 성장을 늦추는 역할을 수행하며, 이전에는 보고된 바 없는 독특한 광물 형성 기작을 완성했다.
    “익숙한 주제를 확장하는 대신 생소한 영역에 도전하다 보니, 기존에 사용하지 않았던 분석 테크닉을 새롭게 배우고 실험 세팅을 밑바닥부터 구축해야만 했습니다. 광물학적 관점에서도 완벽히 수용 가능한 수준의 엄밀한 데이터를 제시하고자 통상적인 연구보다 배 이상의 시간을 투입하며 객관적 근거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번 연구는 불포화된 수용액이 동결되면서 광물이 형성되는 현상을 최초로 보고했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들과 궤를 달리한다. 수용액의 동결 과정 동안 일어나는 결정화 반응을 원위치에서 실시간으로 분석했을 뿐만 아니라, 얼음 내 광물의 독특한 특성과 물리화학적 기작을 규명했다. 이러한 분석 데이터는 그동안 간과되었던 빙권 환경 내 지화학 반응의 실체를 구체적인 수치와 이미지로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해당 연구의 성과는 국제학술지 ‘미국과학원회보(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2025년 5월 29일 게재되었다. 

    한계를 넘은 집념, 얼음 화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실험의 외형적 절차는 단순해 보일 수 있으나 그 내면에는 기존 연구의 논리적 맹점을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이 숨어 있었다. 대개의 연구는 시료를 얼린 후 다시 녹여서 결과를 분석하는데, 이 경우 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화학적 변화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 교수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걷어내기 위해 동결 중인 시료에서 실시간으로 광물이 형성되는 과정을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타 연구자들이 쉽게 시도하지 않는 고난도 영역이었음에도, 연구의 엄밀성을 위해 가속기 분석이라는 정면 돌파를 선택하며 기술적 난제 해결에 나섰다.
    가속기 시스템에 직접 장착할 '콜드 챔버'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과정은 연구의 성패를 가르는 분수령이었다. 포항 가속기 연구소와 미국 시카고 아르곤 국립연구소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빔라인에 최적화된 저온 시스템을 완성할 수 있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국가 간 이동이 제한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원격 협업과 집요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운명적이게도 가속기가 대대적인 업그레이드를 위해 장기 셧다운에 들어가기 직전, 단 한 번의 시도에서 완벽한 데이터를 산출하며 연구는 극적인 성공을 거뒀다.
    “녹인 시료를 분석하는 관례적 방식으로는 동결 중에 일어나는 순수한 반응을 완벽히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속기 빔 타임 확보와 특수 장치 설계라는 험난한 과정을 거치며 얻어낸 첫 번째 데이터가 논문에 바로 게재될 만큼 완벽했을 때, 연구자로서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죠.”


    이러한 집념으로 도출된 성과는 전 지구적 탄소순환 모델의 ‘미싱 링크(Missing Link)’를 연결했다는 점에서 학문적 의의가 크다. 그동안 얼음은 반응물 간의 접촉이 제한된 화학적 불모지로 여겨져 탄소 고착 모델링에서 누락되거나 과소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연구를 통해 망간 탄산염 광물이 동결 농축을 통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체계화함으로써, 빙권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고체화해 저장하는 중요한 싱크(Sink) 역할을 수행함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나아가 이번 연구는 상온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나노 구조의 구형 광물을 합성해내며 재료과학 분야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동결 환경이라는 특수한 물리·화학적 조건이 결정의 핵 생성과 성장 기작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결과다. 이 원리를 명확히 이해하고 조절할 수 있게 된다면, 기존의 상온 공정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웠던 독특한 형태와 성분을 갖춘 기능성 소재를 설계하는 단계까지 확장될 수 있다.
    “준액체층 내의 농도나 이온 강도, 미세 공간의 크기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조절할 수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물질을 맞춤형으로 합성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이는 재료, 물리, 화학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가야 할 거대한 도전이자 다학제간 협업의 장이 될 것이라 봅니다.”
    이 교수는 이번 성과가 얼음이라는 미답의 영역을 이해하는 기초 자산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전 지구적 온난화로 빙하가 급격히 녹아가는 상황에서, 얼음 속에 갇혀 있던 물질들이 일으키는 역동적인 반응은 미래 생태계를 예측하는 핵심 변수이기 때문이다. 비록 기술적 한계와 방대한 범위로 인해 긴 호흡이 필요한 여정이겠지만, 이 교수는 이번에 구축한 연구 방법론이 전 세계 동료 연구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더 발전된 논의로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20년의 궤적이 증명하는 지화학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

    이 교수는 지난 20여 년간 열역학 및 반응속도 이론을 근간으로 지표 환경에서 발생하는 지화학 반응 기작을 체계적으로 규명하는 데 매진해 왔다. 단순한 현상 관찰을 넘어 복잡한 자연계의 반응 원리를 기초과학적 관점에서 파고든 그의 연구들은 기존 학계가 간과했던 새로운 경로를 제시하며 지화학 분야의 패러다임을 전환해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적인 성과 중 하나는 1급 발암물질인 6가 크롬의 자연 발생적인 오염 경로를 세계 최초로 규명한 일이다. 이전까지 6가 크롬은 주로 인위적인 산화제에 의해 생성되는 산업 오염 물질로 인식되었으나, 이 교수는 별도의 인위적 개입 없이도 자연환경 내에서 스스로 생성될 수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3가 크롬 고체 표면에서 용존 망간의 이질 산화 반응을 통해 강력한 산화제인 망간 산화물이 형성되고, 이것이 다시 크롬을 산화시키는 지화학 반응 경로를 제시한 이 연구는 환경 과학 분야의 최고 권위지인 ‘Environmental Science & Technology(2014)’에 게재되며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고체와 고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표면 촉매 효과를 광물의 용해 및 침전 현상에 최초로 적용하며 지화학 반응의 새로운 모델을 구축했다. 고체 반응 기질의 표면 촉매 효과가 광물상의 변화에 현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 이 성과는, 2020년 작고한 세계적 석학 제임스 모건(James J. Morgan) 교수의 추모 헌정 특별호에 한국인 저자로서는 유일하게 초청 논문으로 게재(2021)되어 그 독창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망간 이온의 거동에 대한 미시적 연구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지표 환경에서 수심 종의 산화물로 존재하며 다양한 화학적 반응성을 나타내는 망간은 그 형성 기작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다. 이 교수는 망간 이온이 침철석 표면에 흡착되는 특성을 원자 규모에서 최초로 규명(2020)함으로써, 망간 산화물의 형성 및 반응 원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기초 자료를 제공했다.
    이처럼 20여 년간 쌓아온 탄탄한 지화학적 기초와 열역학적 분석 역량은 이번 ‘얼음 지화학’ 성과를 끌어낸 핵심 동력이 되었다. 광물 형성에 관한 고도의 통찰과 가속기 분석 등을 활용한 정밀한 관측 노하우가 결집한 결과, 빙권이라는 극한 환경 속에서 ‘동결 결정화’라는 미답의 영역을 개척하고 원소 순환의 새로운 경로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그의 연구 지평은 과망간산에 의한 3가 비소의 산화 반응 기작 규명부터 영가 마그네슘을 이용한 오염 물질 제거 기술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뻗어 있다. 특히 영가 마그네슘과 물 사이의 반응 기작을 최초로 규명하고, 수용액 조건에 따른 반응성을 정밀하게 분석한 연구들은 환경 오염 저감 기술 발전에 필요한 견고한 기초과학적 토대를 마련했다.


    환경지구화학 연구실의 ‘순수 과학’ 정신

    환경지구화학 연구실은 지질학적 토대 위에서 화학적 실험을 병행하며 자연현상 그 자체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퓨어 사이언스(Pure Science)’를 지향한다. 국내 환경 연구 지형이 주로 오염 정화나 기후 변화 대응 등 실용적 성과에 집중된 것과 달리, 이곳은 선진국형 기초 과학 모델을 따르며 현상의 근원을 파고든다. 이러한 연구 특성상 결과 도출까지 긴 시간이 소요되기에 정량적 성과보다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열정이 구성원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좁은 커뮤니티와 적은 수요라는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탐구에 대한 의지가 확고한 연구자들이 모여 학문적 깊이를 더하고 있다.
    “우리 연구실은 사회적 현안이나 실용적 성과에 매몰되기보다 자연현상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둡니다. 학생들에게도 리워드는 논문의 개수가 아니라 본인의 지적 호기심 충족뿐이라고 강조하죠.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 열정이 없다면 버티기 힘든 길이지만, 그만큼 남아 있는 이들의 탐구 의지는 어느 곳보다 확고합니다.”
    연구과정에서 이 교수가 가장 강조하는 핵심은 ‘자신이 모르는 지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드러내는 용기’다. 대개 연구자들은 지적 권위를 방어하기 위해 무지를 숨기려 하지만, 탐구는 모르는 영역을 명확히 규정하고 그 경계를 허물어가는 과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세미나에서 먼저 무지를 고백하며 학생들이 부끄러움 없이 질문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누군가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듣는 이의 부족함이 아니라 말하는 이가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러한 지적 정직성은 연구실 내에서 생산적인 디스커션을 가능케 하는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이러한 지적 소통과는 별개로, 실험 과학을 수행함에 있어 이 교수가 결코 타협하지 않는 원칙은 데이터의 신뢰성이다. 특정 현상이 관찰되었을 때 그것이 우연이 아닌 필연적인 결과임을 확신할 때까지 반복적인 검증 과정을 거친다. 최근 학계가 빠른 논문 게재에 매몰되어 단발성 결과만으로 해석을 시도하는 경향을 경계하며, 재현성이 확보되지 않은 데이터는 결코 수용하지 않는다. 타인의 데이터에 의존하지 않고 연구자 스스로가 직접 수행해 확인한 결과만이 연구의 생명력을 담보한다는 믿음은 연구실 운영의 철칙으로 자리 잡았다.
    “본인이 직접 수행해 재현성을 확인하지 못한 결과는 차후 연구자 본인에게도 확신을 줄 수 없습니다. 만약 나중에 결과가 뒤집힐 경우 연구 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기 때문이죠. 데이터의 신뢰성이 담보되지 않은 연구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며,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데이터를 얻을 때까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연구실에서는 이전 연구원이 도출한 우수한 데이터가 있더라도 후임자가 처음부터 모든 실험을 다시 수행하며 재현성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과의 일관성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확신을 가지고 논문을 작성하기 시작하는 식이다. 속도보다는 방향을, 성과보다는 진실을 우선시하는 이러한 태도는 환경지구화학 연구실이 척박한 기초 과학 환경 속에서도 독보적인 학문적 성과를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이다.


    견딤의 시간이 빚어낸 지적 호기심, 영원한 탐구자를 꿈꾸다

    2005년 부임 이후 보낸 20년의 세월 중 초기 10여 년은 한국 연구 생태계에서 정량적 평가가 절대적인 잣대로 작용하던 시기였다. 이 교수는 연구 특성상 논문 산출 속도가 느린 편이라 이 시기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어야만 했다. 동료들이 매년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할 때 2~3년씩 단 한 편의 결과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주변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과 함께 가고 있는 길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이 밀려왔다. 소규모 연구실과 좁은 학문적 커뮤니티라는 환경 속에서 저조한 논문 편수는 연구자로서 지우기 힘든 심리적 압박이자 부담이었다.
    “그 압박을 화려하게 이겨냈다기보다 묵묵히 견뎌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흥미 없는 주제로 다작을 하거나 적당히 타협해 결과를 포장할 수 없는 성향 탓에, 고통스럽더라도 본인이 옳다고 믿는 방식을 고수하며 시간을 보냈죠. 화려한 성취보다 중요한 것은 결과에 대해 스스로 떳떳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고, 그 견딤의 시간들이 모여 지금 연구실의 독보적인 신뢰를 구축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환경지구화학이라는 외길을 지속하게 만든 원동력은 스스로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지적 호기심이었다. 익숙한 주제를 연계해 후속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 다시 새로운 현상에 매료되는 성향이 그를 끊임없이 미답의 영역으로 이끌었다. 제한된 인생의 시간 속에서 이미 아는 것을 반복하기보다 아직 모르는 영역을 탐구하는 것이 가치 있다는 판단은 매번 막대한 시간을 소요하게 했으나, 이는 지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실제 환경과 유사한 세팅을 실험실 내부에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은 이 학문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기도 하다. 지질학적 현상은 대개 인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거나 측정 불가능한 영역에서 발생하기에 많은 연구가 모델링에 의존하지만, 이 교수는 수계 반응 연구를 통해 가설로만 존재하던 현상을 실험실에서 직접 입증해 나갔다. 모델링의 불확실성에 기대기보다 용액 반응을 유도하고 그 결과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며 현상을 직접 확인하는 과정은 그에게 비교할 수 없는 학문적 희열을 선사했다.
    “죽는 순간까지 연구를 지속하고 싶다는 꿈을 오래전부터 품어왔습니다. 정년 이후에도 기회가 된다면 해외 어딘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하죠. 물리적인 에너지는 예전만 못할지 몰라도, 시간과 경험이 쌓이면서 얻게 되는 학문적 성숙과 숙성된 통찰은 시니어 연구자만이 가질 수 있는 소중한 가치라고 믿습니다.”
    이 교수가 걸어온 길은 외부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의 질문에 답해온 과정이었다.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데이터를 얻기 위해 기꺼이 시간을 투입하고, 남들이 보지 않는 얼음 속 미세한 변화에 주목했던 집념은 이제 우리나라 ‘얼음 지화학’의 새로운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결정핵을 형성하고 성장하는 광물처럼, 그의 연구 인생 또한 긴 축적의 시간을 지나 단단하고 독보적인 결정체로 빛나고 있다. 비록 세상의 속도보다 느릴지라도, 가장 차가운 곳에서 가장 뜨거운 호기심을 태우는 그의 탐구는 멈추지 않는 빙하의 흐름처럼 묵직하게 다음 지평을 향해 나아간다.


    취재기자 / 안유정(reporter1@s21.co.kr)

    <이 기사는 사이언스21 매거진 2026년 3월호에 게재 되었습니다.>

  • 글쓴날 : [26-03-09 09:53]
    • 최진민 기자[reporter2@s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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