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근거에 의한 준안정상 소재 개발 중점
모든 물체는 열역학적으로 에너지가 높은 불안정한 상태보다 에너지가 낮은 안정한 상태로 존재하고자 한다. 따라서 일상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물질은 열역학적으로 에너지가 가장 낮은 안정한 상태이다. 하지만 준안정상 물질은 열역학적 에너지가 안정성보다 높지만, 안정상으로 변화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양이 매우 커서 높은 에너지를 가하지 않는 한 준안정상 그대로 존재한다.
일례로, 에너지가 높고 불안정한 상태인 다이아몬드가 안정한 상태의 흑연으로 변화하기 위해 필요한 온도는 1,200도 이상에 달한다. 다이아몬드와 흑연의 예처럼 같은 원소로 구성된 소재임에도 다른 물성을 가진다는 점 때문에 준안정상을 기반으로 한 신소재 개발은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안정상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물성을 갖는 준안정상 관련 연구는 흥미 있는 주제입니다. 하지만 준안정상 신소재 개발 연구의 주요 트랜드는 연구자의 경험, 직관, 추론 등 경험적인 방법론을 근간으로 하는 연구입니다.
하지만 준안정상 물질의 특징을 규정하기 어렵고, 극한의 환경에서 만들어지다 보니 공정 및 합성 방법 또한 매우 제한적인 실정이죠. 이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준안정상 합성 조건에서 다양한 변수를 제어하는 체계적인 방법론과 이를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소재 개발 패러다임이 필요합니다.”
액체 안에서 나노결정을 성장시키고, 일어나는 일들을 투과전자현미경으로 관찰·분석해 온 천 박사 연구팀은 팔라듐(Pd)에 주목했다. 팔라듐은 백금과 비슷한 촉매 성능과 함께 자체 부피의 900배나 되는 수소를 흡수할 수 있는 성질을 갖고 있는 차세대 수소 에너지의 핵심 소재이다.
그렇지만 백금, 금 등의 경우 투과전자현미경을 이용한 결정 성장과정 및 성장기전 규명연구가 많이 보고되고 있는 반면, 팔라듐은 이에 대한 연구 보고가 전혀 없었던 상황이다. 이에 연구팀은 ‘팔라듐은 관련 연구 결과가 보고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호기심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해 여러 연구자들과의 논의를 거쳐 팔라듐을 통한 준안정상 신소재 개발 및 이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화를 시도했다.
새로운 준안정상 소재합성 방법론 제시
일반적으로 수소저장이 가능한 소재를 충분한 수소분위기에 노출시켜 수소원자의 소재 내부로의 확산(Diffusion) 과정을 통해 금속수소화물을 제작한다.
연구팀은 내부에 수소를 확산시키는 방법 대신, 충분한 수소분위기에서 팔라듐 결정성장을 유도해 새로운 결정구조를 갖는 준안정상 팔라듐 수소화물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개발된 준안정상 팔라듐 수소화물은 기존에 알려진 안정상 소재보다 우수한 열안정성과 더불어 수소저장 성능이 2배에 가까운 것으로 확인되었다.
“투과전자현미경에 액상 셀을 장착하고, 팔라듐 전구체 농도 변화에 따라 액상셀 내부에서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팔라듐 수소화물(PdHx)의 결정구조 및 수소함유량을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기존의 면심입방구조(FCC)와는 다른 육방밀집구조(HCP)를 갖는 준안정상 팔라듐 수소화물이 형성됨을 확인했고, 액체 내부 수소농도의 증가에 의해 수소함유량 또한 증가함을 확인했습니다. 더불어 밀도범함수 이론 계산 및 몬테카를로 계산을 통해 새로운 준안정상 수소화물의 생성원리를 규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준안정상 금속수소화물 합성방법의 과학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원자분해능 전자토모그래피(Atomic Electron Tomography) 분석법으로 나노미터 크기의 금속수소화물 결정을 분석했다. 원자분해능 전자토모그래피는 2차원적인 전자현미경 이미지들로부터 3차원 이미지를 재구성하고 이로부터 물질의 3차원적인 원자 구조 정보를 직접적으로 얻어내는 최신 분석기술이다.
실험 결과를 통해 3차원 구조의 준안정상 팔라듐 수소화물이 기존 소재와는 다른 특이한 원자배열을 갖고 있음을 확인했고, 국제 연구계에 ‘다단계 결정화과정’이라는 새로운 준안정상 성장모델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롭게 만든 팔라듐 수소화물은 기존 소재와는 다른 결정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연구 초기에는 새로운 결정구조를 갖는 소재가 합성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해 실험결과를 해석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에너지적으로 불안정한 새로운 소재가 생성되는 기전을 설명하기 어렵기도 했고요. 다행스럽게도 KIST 이영수 박사님과 유성종 박사님, KAIST 양용수 교수님, Postech 손창윤 교수님 등 여러 연구자분들이 연구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 주셔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이번 연구결과는 기존에 보고된 바 없는 새로운 준안정상 팔라듐 수소화물(PdHx) 소재 개발과 함께 생성 기전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또한 수소와 리튬 등의 경량 원소를 함유하는 합금소재의 새로운 합성 방법론을 제시함에 따라 수소연료전지와 저장장치 등 친환경 에너지소재 개발로 응용될 수 있다.
“새롭게 개발한 준안정상 소재합성 방법론은 현대 반도체 산업의 핵심기술이 된 초크랄스키 기술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분야에 사용되며 소재 혁신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후속 연구로 레이저 및 대면적 전자빔 조사 시스템을 이용한 팔라듐 수소화물 생산량 증가 연구를 진행하고, 다른 귀금속 물질 및 수소저장이 가능한 금속수소화물을 합성하는 데에 새로운 공정법을 도입해 금속수소화물 신물질 개발 연구를 수행할 예정입니다.”
이번 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지원을 받아 KIST 미래원천청정신기술 개발 사업 및 미래소재디스커버리 사업으로 수행되었고, 세계 최고 권위의 과학저널인 ‘네이처(Nature)’지에 2022년 3월 23일 게재되어 국내 연구진의 저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수소저장시스템 적용 원천기술 확보
그동안 천 박사는 친환경 미래형 에너지로 주목받는 수소의 저장 및 활용 효율을 높이기 위한 연구를 수행해 왔다. 우리나라는 연료전지 기술의 수준이 매우 높고, 그린수소 생산 등의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개발이 이뤄지고 있지만, 저장 및 운송 인프라에 대한 기술적, 산업적 기반은 취약한 실정이다. 또한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 고압가스 기반 수소저장 인프라를 설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워 수소에너지의 본격적인 활용은 요원하다고 할 수 있다.
“수소는 미래사회가 활용하게 될 청정에너지원이며 지금보다 활용범위를 더 넓히기 위해서는 수소를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저장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들이 추가적으로 개발되어야 합니다.
고체 수소저장 기술 중 금속수소화물을 이용한 수소저장 기술은 향후 활용 가능성이 높은 기술 중 하나이며, 이 기술의 실용화를 앞당기기 위해 폭넓은 연구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특히 나노미터 스케일에서 수소와 금속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반응을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을 얻는 것은 본 기술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필요성에 중점을 두고 KIST 서진유 박사, 연세대학교 이규형 교수 연구팀과 함께 공동연구를 수행한 결과 지난해 9월에는 전자현미경을 통해 세계 최초로 마그네슘(Mg)과 철(Fe)로 구성된 금속수소화물의 분해과정을 나노미터 스케일의 높은 해상도로 실시간 관찰하는 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수소원자가 금속 수소화물 고체 내부에 존재하는 초기상태에서 외부로 이동하면서 기체 상태로 바뀌는 과정을 관찰했을 뿐만 아니라 분해과정 이후 금속수소화물 내부에 남아있는 수소의 양을 계산했다.
그동안 금속수소화물의 물성에 대한 예측은 전자현미경을 통해 관찰한 매우 작은 소재 샘플에서 얻은 결과여서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연구팀은 매우 작은 크기의 샘플(100㎚)과 상용화를 위해 제작한 대량의 금속수소화물소재 샘플(수㎜)을 비교한 실험에서 같은 현상이 재현됨을 확인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전자빔에 의해 발생하는 샘플 손상을 최소화해 금속소재 내부의 수소 이동 과정을 관찰할 수 있게 됨으로써 수소저장 신소재 개발 연구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자번호 1번인 수소는 전자와 양자를 하나씩 갖고 있기 때문에 전자 혹은 양자의 시그널을 분석하는 현재의 분석기술 수준으로는 수소의 이동을 관찰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번 연구성과는 고체 내부에 존재하는 수소 이동을 관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체 수소저장시스템 개발을 위한 국가 대형 과제에 본 기술을 적용해 안전한 수소저장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일상생활에 수소에너지가 널리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이번 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지원을 받아 KIST 주요사업 및 한국연구재단 중견연구자지원사업으로 수행되었으며, 연구 결과는 지난해, 재료 및 에너지 분야의 권위지인 ‘어드밴스드 펑셔널 머터리얼즈(Advanced Functional Materials)’지에 게재되었다.
겸손함에서 성공의 길을 찾다
영국의 대시인이자 극작가인 T.S엘리어트는 ‘겸손은 가장 얻기 어려운 미덕’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자기 자신을 높이 생각하려는 욕망만큼 여간해서 가라앉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정신적 노력이 부단히 필요한 일이지만 천 박사는 연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덕목이 겸손함이라고 강조한다. 과학도 결국은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인 만큼 정신적인 성숙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겸손함과 성실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만심에 실험결과를 미리 예측한다거나 데이터를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되죠. 언제든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올 수 있는 만큼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실험을 진행하고,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을 때는 주의 깊게 관찰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데이터를 쉽게 버릴 것이 아니라 데이터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분석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겸손함을 중시하는 마음은 공동연구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천 박사는 재료과학, 특히 전자현미경 분석기술을 기반으로 기초연구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소재를 만드는 기술, 소재생성 원리를 규명하는 계산과학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며, 이러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다른 연구자들과의 협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그는 스스로가 부족한 부분은 없는지 검증하고, 이를 채우려고 노력하며, 다른 연구자들에게 언제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연한 자세로 연구라는 그림을 완성해 나가고 있다.
앞으로 천 박사는 준안정상 소재합성 방법론을 근간으로 하는 금속수소화물 신물질 개발에 힘을 쏟는 동시에 수소저장용 금속수소화물 개발 및 수소에너지 시스템 적용과 관련된 연구에 더욱 집중할 계획이다.
더불어 준안전상 대량생산 시스템을 개발해 연구팀이 발견한 새로운 소재의 물성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이렇듯 새로운 소재,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 싶다는 강한 도전의식과 연구자로서의 일생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겠다는 그의 다짐은 오늘도 연구에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취재기자 / 안유정(reporter1@s21.co.kr)
<이 기사는 사이언스21 매거진 2023년 7월호에 게재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