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에 탑재된 첨단 센서 가운데 하나인 홀센서는 자기장에 의해 전류방향에 수직으로 생기는 전위차를 이용한 센서다. 주로 정밀하게 자기장의 크기를 측정해 방향을 알려주거나 정해진 경로로 로봇을 이동할 때 사용된다. 이러한 홀센서를 양자정보에 활용할 수 있는 위상홀효과(인접한 스핀들 간 꼬인 정도에 비례해 나타나는 홀효과)가 자성체 양자나노구조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이번 연구결과는 외부 환경 변화에 관계없이 안정적으로 보존되는 양자정보소자 연구에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새로운 양자현상 발견 및 위상 양자컴퓨터 등으로 응용 가능성을 넓히기 위해 후속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세종대학교 천승현 교수를 만나 연구 히스토리를 들어보았다.
새로운 메커니즘에 의한 위상홀효과 절실
전하의 흐름(x축 방향)에 수직 방향으로 자기장을 인가할 때(z축 방향), 횡 방향(y축 방향)으로 발생하는 전위차를 홀전압이라 부르고, 이와 같은 현상을 홀효과(Hall effect)라 부른다. 1879년 Edwin Hall에 의해 발견된 이래, 홀효과는 다양한 변주와 함께 여러 노벨상 수상에 기여해 왔다.
위상홀효과(Topological Hall effect)는 실공간(Real space)의 스핀 비대칭성(Spin chirality)에 의해 나타나는 전위차로, 스커미온(Skyrmion)과 같은 특이한 스핀분포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20여 년 전 망간산화물 등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스커미온은 자성체 속에 생기는 소용돌이 모양의 스핀 구조체를 말한다. 1, 0, -1 등의 위상값을 갖고 있어 데이터의 기본 단위로 쓸 수 있으며, 크기가 아주 작고 안정적이며 전력소모가 거의 없어 차세대 뉴로모픽 컴퓨팅의 핵심 요소로 각광받고 있다. 최근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 한국표준과학원은 각각 스커미온 기반 전자소자의 핵심 기술들을 개발하기도 했다.
“위상홀효과는 스커미온과 같은 특이한 스핀분포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특징입니다. 그동안 위상홀효과나 스커미온이 발견된 복합구조들은 백금이나 위상부도체(디락 및 바일 준금속, 위상 초전도체 등과 같은 위상물질 가운데 하나) 같은 특별한 물질과 강자성체의 조합뿐이어서 새로운 구조나 메커니즘에 의한 위상홀효과의 발견은 스커미온의 위상 특성을 이용한 양자스핀소자 발전이나 위상 양자컴퓨터의 개발을 위해 절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승현 교수는 20여 년 전 위상홀효과가 처음 발견될 당시 참여한 경험이 계기가 되어 이후로도 줄곧 관심을 가져왔다. 그동안 그래핀 등의 2차원 물질 연구를 수행하면서도 자성체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고, 한국연구재단의 중점연구소 및 선도연구센터 사업 참여로 칼코겐물질 성장을 위한 분자선속증착(MBE) 장비를 구축하면서 마침내 위상부도체 및 2차원 자성체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분자선속증착 장비는 원자 단위로 정밀하게 박막을 성장하는 데에 쓰이는 초고진공 장비다.
강자성체와 반강자성체 이중층에서 위상홀효과 확인
연구 기반이 마련되었지만, 성과를 거두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연구팀은 위상부도체 박막의 성장 연구에 선도그룹에 비해 늦게 시작한 만큼 재현성 있는 연구결과를 얻는 데에 집중했다. 그 결과, 비정질 표면 위에 세계 최초로 성장에 성공하는 등 의미 있는 성과를 이루었지만, 2차원 자성체는 단일상의 형성에 계속 실패하며 수년간 마음고생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위상물질이나 2차원 물질 분야의 연구 발전 속도는 매우 빠릅니다. 우리 연구팀은 상대적으로 인력이나 분석기술 등 연구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을 고려해 독창적인 성과를 위한 아이디어에 가장 중점을 두었습니다. 선도그룹의 연구 추이를 보면서 일부는 재현을 통해 기초기술을 확보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구조에 대한 모험적 시도 또한 수없이 거듭했죠.
6가지의 원소(Bi, Sb, Sn, Se, Te, Cr)로 가능한 여러 가지 조합을 시도해보고, 안정적인 구조들을 찾으면 이들을 서로 적층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며 새로운 메커니즘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왔습니다.”
이러한 다각적인 노력에 힘입어 연구팀은 분자선속증착 장비로 2차원 자성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던 중 위상홀효과가 나타나는 새로운 메커니즘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강자성체인 Cr2Te3 박막만 증착하면 기존에 알려진 바대로 자기 모멘트값에 비례하는 이상홀효과가 보이는 반면, 반강자성체 Cr2Se3 박막을 같이 증착할 경우 자기 모멘트의 미분값에 비례하는 위상홀효과로 바뀌어버리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강자성체란 흔히 말하는 자석으로, 철(Fe)과 같이 스핀이 한 방향으로 정렬된 물질이고 반강자성체는 스핀이 위-아래-위-아래처럼 교대로 정렬된 물질을 말한다. 강자성체-반강자성체 이중층은 거대 자기저항 현상이나 컴퓨터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 읽기 헤드의 핵심 역할을 담당할 만큼 친숙한 나노구조이지만, 위상홀효과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이뿐 아니라 밀도범함수이론을 이용해 대칭성 깨짐에 의해서 스커미온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따라서 이번 연구를 통해 위상학적으로 안정된 스핀 구조체가 생성되는 새로운 메커니즘을 제안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는 외부 환경 변화에 관계없이 안정적으로 보존되는 양자정보소자 연구에 커다란 단초를 제공했음을 의미한다.
“강자성체-반강자성체 이중층에서 위상홀효과가 발견된 것은 2차원적 특성이 더해진 결과로 생각되며 이를 규명하기 위한 추가적인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직접적인 관찰에 의해 스커미온까지 발견하게 되면 차세대 컴퓨팅에 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커지게 되는 것이죠. 우리 연구팀이 위상부도체 박막 성장을 선도하고 있는 만큼, 위상물질과 결합된 새로운 양자현상 및 위상 양자컴퓨터 등으로의 응용을 모색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번 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추진하는 중견연구사업의 지원으로 수행되었으며, 나노분야 국제학술지 ‘ACS Nano’에 지난해 5월 27일 온라인 게재되었다. 세종대학교 김건 교수, 부산대학교 박성균 교수 연구팀과 공동으로 연구를 수행했다.
남과는 다른 것이 경쟁력이다
천 교수가 이끌고 있는 ‘스핀전자연구실’은 위상부도체와 자성체가 결합된 새로운 양자현상의 발견 및 응용, 그래핀 직성장을 응용한 소자의 개발(에너지, 압력, 발광)에 집중하고 있다.
대표적인 성과를 되짚어보면, 먼저 2014년 그래핀을 발광다이오드(LED) 기판 위에 성장이 가능하도록 하는 기술을 개발, 고온 과정에서 발생하는 단점 등을 해결한 바 있다.
그전까지 그래핀은 구리판 위에서만 성장이 가능해 다른 기판 위에 옮기는 과정이 필수적이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었다. 또한 그래핀을 성장시키는 방법은 섭씨 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이루어졌으나 이러한 공정과정에서 반도체나 LED 소자 등의 경우 원래의 성능이 사라지는 단점이 있었다.
이에 연구팀은 플라즈마 화학증착(CVD) 기술을 이용해 LED 소자의 손상 없이 수 겹의 그래핀을 직접 성장시키는 데 성공하며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평가받았다. 서울대학교 윤의준 교수 연구팀과의 공동연구로 수행되었으며, 연구결과는 ‘ACS Nano’에 온라인 게재되었다.
2015년에는 국내 연구진이 원자 한 층 두께 그래핀을 이용한 고효율 가시광 발광소자를 세계 최초로 개발(‘Nature Nanotechnology’ 온라인 게재)하는 데 힘을 보탰다. 당시 공동연구팀은 전구 필라멘트처럼 그래핀을 공중에 띄우는 방법으로 세상에서 가장 얇은 원자 한 층 두께(0.3㎚)의 그래핀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빛은 기판 바닥으로부터 반사되어 나온 간섭효과로 만들어진다. 또한 그래핀과 기판 간 거리를 조절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다양한 색을 구현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2022년에는 세종대학교 이성훈 교수와 함께 우수한 민감도와 신축테스트 안정성을 보여주는 저항 기반의 플렉시블 압력센서를 개발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이 연구는 수직성장형 그래핀이 가지는 독특한 구조를 응용해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는 기술을 다루고 있다.
공동연구팀이 개발한 압력센서는 전류가 흐르지 않을 정도로 늘려진 상태에서 최초 상태로 기판이 복원될 때 원래 저항 상태로 돌아온다. 빽빽하게 얽힌 3차원 그래핀 구조로 인해 전류가 흐를 수 있는 채널이 재구성되는 것을 전자현미경으로 실시간 관찰했으며, 신축성 폴리머 기판이 찢어지더라도 다시 붙으면 벨크로처럼 전류가 흐른다. 연구결과는 전자공학 분야 상위 1% 국제저널인 ‘npj Flexible Electronics’에 게재되었다.
이처럼 천 교수는 SCI 게재 논문이 130여 편에 달하고, 피인용 횟수가 6,000여 회를 훌쩍 넘어서는 등 과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겨 왔다.
현재 세종대학교 물리천문학과 교수이자 자연과학대학장을 역임 중일 뿐 아니라 중견연구자지원사업/전략과제/핵심연구사업/특정기초연구사업/일반연구자사업/기초연구자사업/신진연구자사업 연구책임자를, 선도연구센터/중점연구소/해외공동연구소/나노원천기술개발사업 공동연구원을 수행하는 등 굵직굵직한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
현재 국내 기초과학 분야의 선도적인 위치에 서기까지 천 교수 역시 수없는 실패와 극복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는 연구철칙을 흔들림 없이 지켜 왔고, 그동안 일군 성과들을 통해 그의 신념이 옳았다는 사실을 입증해냈다.
“국내에 없거나 드문 연구 주제에 대해 기반을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평소 연구원들에게도 다소 엉뚱하다고 여길 수도, 무모하다고 생각할 수 있더라도 과감하게 도전해 보길 권하고 있죠.
때로는 엉뚱한 도전과 호기심이 위대한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고, 무엇보다 이미 남들이 한 것을 해서는 경쟁력을 갖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세계 최초, 최소한 국내 최초의 연구를 목표로,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 교수는 언제나 쉬운 길을 버리고, 남들이 가지 않은 개척자로서의 길을 선택했다. 물론 그 길이 완만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것을 찾겠다는 그의 소신은 변함이 없었고, 오랜 시간 외길을 걸어온 결과 그의 연구력과 노하우는 한층 두터워졌다. 그리고 이제 기초연구 분야에서 명실상부한 리더로 자리매김하며, 누구도 따라가기 힘든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대학 박사급 연구인력의 체계적 지원 급선무
유엔(UN)은 2022년인 올해를 ‘세계 기초과학의 해’로 지정했다. “기초적이고 호기심에 기반한 과학 연구가 없었다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은 더욱 나빴을 것이다.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 달성을 위해서도 기초과학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유엔이 밝힌 지정 배경이다.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진단검사, 역학 모델링, 바이러스 기초분석 등 인류가 코로나19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해준 도구들이 모두 기초과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유엔의 결정에 지지를 보내며 기초과학의 진흥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꾸리기도 했다. 과학계의 입장에서는 매우 반가운 일이지만, 현장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 상황이다. 지속가능 발전을 강조하는 유엔의 취지에 맞는 정책으로 우리나라 과학의 중흥기를 이끌 수 있을 것인지, 신선함을 찾을 수 없는 관성적인 정책에 머무를 것인지 그 어느 때보다도 관심이 큰 가운데 과학 주체들의 역할도 더욱 커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기초연구연합회의 활약이 도드라진다. 기초연구연합회는 ‘창의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연구환경 조성’과 ‘과학의 저변 확대’라는 목표 아래, 기초연구의 중요성에 동의하는 기초연구 관련 학회의 회장/이사장 및 대의원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실무 이사진과 회장, 부회장, 고문으로 구성된 기초연구학회들의 연합체다. 연구자 중심의 창의적인 기초연구의 진흥을 위해, 매해 ‘국가 R&D 정책 포럼’을 국회에서 개최하고 회원학회로부터 발굴된 기초연구의 대표적 성과 사례를 선정하고 있다.
천 교수는 현재 기초연구연합회의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기초기반전문위원회 위원으로서 참여하며, 국내 기초연구 강화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앞서 2020년 기초연구진흥유공자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 표창을 수상하는 등 기초연구 강화에 기여해 온 천 교수는 우선적으로 대학 연구전담인력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을 통해 연구의 질적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초연구의 질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학의 연구소 문화를 정착시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지원 속에서 창의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무엇보다도 대학의 박사급 연구인력에 대한 체계적인 파악과 지원으로 전주기적 연구 경로를 제공해야 할 것입니다.
전문적인 지원을 통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우수한 인재들이 선진국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국내 대학에 정착하며 대학의 연구역량은 물론, 나아가 기초연구의 질적 향상을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튼튼한 기초가 건물의 효능을 보장하듯이 연구도 마찬가지다. 기본을 도외시한 채 눈앞의 성과만을 추구한다면 결국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펼쳐갈 천 교수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가져오는, 이 기본이라는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본질을 중시하는 그의 곧은 정심(正心)이 우리나라 과학계가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데 큰 힘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취재기자 / 안유정(reporter1@s21.co.kr)
<이 기사는 사이언스21 매거진 2023년 1월호에 게재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