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체 소재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다
광자결정을 이용한 고효율 백색광 구현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전헌수 교수
현대 조명 및 디스플레이 산업 분야에 필수적인 요소인 형광체는 에너지가 높은 전자나 빛을 흡수한 후 에너지가 낮은 상태의
빛으로 방출하는 물질이다. 지금까지 형광체 연구는 형광체의 재료적·물질적인 측면에 치중해 왔으나 이러한 연구 패턴은 효율 개선에 있어 급격히 한계점에 이르고 있다.
연구 패러다임의 전환이 절실한 가운데 최근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전헌수 교수 연구팀이 광자결정(photonic crystal) 구조
를 형광체에 도입하는 접근 방법으로 색변환 효율을 획기적으로 개선, 효율적으로 백색광을 구현하는 데 성공하며 형광체 소재 기술의 새 지평을 열었다. 연구팀의 광자결정 형광체 플랫폼은 다양한 종류의 형광물질 및 소자에 적용할 수 있어 광자학 및 관련 광소자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일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광학적 구조 특성에 기반한 새로운 접근법 활용
4차 산업혁명, 지능정보사회로 진입하면서 조명 및 디스플레이 산업 전반에서 요구되는 발광 소자의 사양은 점차 다양하고 복잡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TV나 모니터가 대형화되고 화질과 분해능이 우수한 디스플레이가 요구됨에 따라 더욱 밝고 선명한 가시광 영역의 광원이 개발되는 상황이다. 반면, 이동통신 및 웨어러블 기기에는 갈수록 소형화된 발광 소자가 요구된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해당 산업 분야에서 고성능·고효율 발광 소자, 특히 백색 광원에 대한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백색 발광 소자 구성의 핵심은 색변환을 유도하는 형광체의 역할이다. 외부로부터 짧은 파장의 가시광 혹은 자외선을 흡수해 긴 파장의 가시광선을 방출하는 형광체는 이제 차세대 조명 및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필수 요소로 응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형광체의 성능 및 효율 향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형광체 자체의 물성을 개선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즉, 형광체의 화학적인 물질 조성을 변화시킴으로써 형광체의 내부 양자 효율을 증가시키거나 흡수 및 발광 파장 영역의 조절 기술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최근에는 물질적 개선을 통해 기존의 YAG:Ce 형광체의 내부 양자 효율이 90%를 능가하게 됐으며, 단순한 크기 조절을 통해 다양한 색깔을 구현할 수 있는 고효율 양자점과 같은 새로운 형광 물질이 개발되는 등 연구의 완성도가 매우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형광체 효율 개선은 급격히 한계점에 이르고 있어 연구 방향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에 그동안 연구해 온 광자결정 구조, 그리고 해당 구조에 수반되는 광자 띠 가장자리(band-edge) 공진 효과를 형광체 연구에 적용한다면 형광체의 색변환 효율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것으로 가정하고, 연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광자결정의 개념이 처음으로 제안된 지 20년 이상의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광자결정의 실용적인 응용 측면에서는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전헌수 교수 연구팀은 광자결정의 띠가장자리 공진 효과를 활용해 여기광과 형광체 구조 사이의 높은 상호 작용을 유도하고, 결과적으로 색변환 효율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광자결정 형광체를 제안하고자 했다. 광자 띠가장자리 효과란 띠(band) 대역(빛의 진행이 가능)과 띠틈(band-gap; 빛의 진행이 불가능) 대역의 경계에 해당하는 파장에서 빛의 진행속도가 0이 돼 빛과 물질 간의 상호작용이 활성화되는 공진 효과의 일종이다. 아울러 이렇게 구성된 적색과 녹색 광자결정 형광체를 청색 LED 위에 적층함으로써 효율적인 백색 광원으로 구성할 수 있음을 실증하는 데 중점을 두고 연구를 진행했다.
형광체 색변환 효율 개선 및 효율적 백색광 구현
연구팀은 광자결정 형광체 구현을 위해 높은 양자 효율을 가진 콜로이드 양자점 물질을 평면상에서 주기적으로 재구성했다. 구체적으로는 투명한 유리 기판 위에 생성된 질화규소 박막 격자 구조 위에 적색 또는 녹색의 양자점 용액을 스핀코팅해 광자결정 형광체를 제작했다.
궁극적으로 청색 LED를 형광체 여기광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광자결정 형광체 구조의 띠가장자리 파장이 청색의 여기광 파장과 일치할 수 있도록 설계·제작했다. 아울러 나노-마이크로 스케일에서 빛의 거동을 규명하고 공진 현상이 일어나는 구조를 설계하기 위해 시간영역 유한차분법(finite-difference time-domain; FDTD)에 기반한 전산모사 방법이 사용됐다.
그 결과 적색과 녹색의 광자결정 형광체를 청색 단일 파장의 직진광으로 여기시키는 경우 구조가 없는 비교 형광체 대비 각각 5배와 3배 이상의 색변환 효율 증가가 관측됐다. 또한 3색성의 백색광을 구현하기 위해 적색과 녹색의 광자결정 형광체를 청색 LED 위에 집적하는 경우 실제 태양빛에 가까운 색좌표(0.332, 0.341)를 구현함에 있어 구조가 없는 비교 형광체 대비 양자점의 양이 33% 절감됐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색광의 세기는 8% 이상 증가했다.
“광자결정 형광체에서 공진 현상이 나타나는 띠가장자리 파장을 청색 여기광에 정확히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나노미터 수준의 오차로 샘플을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나노공정 상에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이에 연구 초반에는 파장이 조절 가능한 여기 광원을 자체적으로 조달해 샘플의 광특성을 조사했습니다. 또한 연구가 완성되어가는 후반에는 샘플 제작의 공정 오차를 최소화할 수 있는 공정 조건 및 노하우를 습득하는 데 연구 역량을 집중했고, 그 결과 백색광 구현에 최적화된 광자결정 형광체를 제작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연구 결과는 기존의 물질·재료적인 측면에 치중한 형광체 연구와 달리 구조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연구이기 때문에 형광체 소재 기술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은 물론 전혀 다른 차원의 형광체 시장 개척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남겼다.
또한 연구팀에 의해 확보된 기술은 LED 및 디스플레이 소자에 직접 적용돼 발광 소자의 월-플러그 효율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특히 국내 기업이 선도적으로 연구 및 상용화를 주도해 나가고 있는 양자점 응용 디스플레이 및 가전 산업 분야에도 더 큰 추진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광자결정 형광체 플랫폼의 가장 큰 장점은 형광체를 구성하는 물질의 종류에 무관하게 적용이 가능한 아이디어라는 점입니다.
연구에서 사용된 콜로이드 양자점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색에너지 변환(다운 혹은 업) 물질에 두루 적용돼 발광 효율을 증가시킬 수 있죠. 특히 분말 형태의 형광체에 비해 높은 안정성과 수명, 공정의 편의성을 가지고 있으나 낮은 발광 효율이 단점인 박막형 형광체 연구 분야에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제시하고 신산업 창출의 동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광자결정 형광체의 띠가장자리 공진 효과에 의한 수광
효율의 증가 원리는 형광체 분야뿐만 아니라 태양전지, 광전소자, 이미징 센서, 광검출기 등 다양한 종류의 수광 소자에 폭넓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한편, 이번 연구결과는 응용물리 및 재료과학 분야 국제학술지인 ‘어드밴스드 머티리얼즈(Advanced Materials)’ 2017년 11월 30일자 온라인 판에 게재되며 과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무질서 이용한 빛의 실용적 제어 가능성 제시
전헌수 교수는 광자결정 형광체 연구와 더불어 최근 빛을 자유롭게 제어할 새로운 광자학적 상태를 발견하며 과학계에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빛을 자유롭게 제어하는 것은 광학 분야의 매우 중요한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존의 광학계는 구조적 측면에서 자유도가 한정돼 다양한 수요에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 무질서한 광학계는 충분한 자유도를 보장하지만 물리학적 이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광학적 특성을 제어하기 위한 논리와 방법이 모호한 문제가 있다.
“앤더슨 국지화 원리에 의하면 무질서한 광학계에서 빛의 평균산란거리는 무질서 정도에 따라 변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광자 띠꼬리(band-tail) 상태는 무질서 계의 고유상태로서 그에 대응하는 평균산란거리를 쉽게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빛의 제어에 매우 유용하리라 예상돼 왔죠. 하지만 광자 띠꼬리 상태의 존재와 광학적 특성은 그동안 실험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한정된 재료 내에서 무질서 계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물질의 시공간적 배치에 대한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에 무질서 계에 있어서도 안정적으로 구조적 자유도를 확보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연구 개발된 무질서 계는 빛의 특성을 원하는 형태로 제어하고 발현시키기 어렵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합니다.”
이에 연구팀은 기존의 무질서한 광학계가 일정 수준 이상의 무질서도에서는 결정구조가 파괴된다는 것에 주목하고, 무질서도에 관계없이 결정구조가 유지될 수 있는 광자결정 합금계를 개발했다.
해당 시스템은 정교한 빛의 제어에 필요한 충분한 수준의 자유도가 확보되면서도 무질서도에 관계없이 결정구조 자체는 유지된다.
InAsP/InP 다중양자우물 박막을 사용함으로써 광자결정 합금 구조를 광학적으로 활성화하고, 그로부터 방출되는 빛에 대한 분광학적 특성을 매우 높은 정밀도로 조사했다. 그 결과 광자결정 합금계의 고유상태는 광자 띠틈 내부에 발현되고 공진파장의 분광학적 범위는 결정구조와 무질서도에 의해 결정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광자 띠꼬리 상태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입증한 것이다.
광자 띠꼬리 상태의 공간적 전자기장 분포는 약한 국지화와 강한 국지화를 폭넓게 아우르는 다양한 양태를 보이며, 그 유효크기는 빛의 파장보다 작은 수준에서부터 광학계의 전 영역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했다. 특히 연구팀은 광자 띠꼬리 상태의 전자기장 집속도가 빛의 공진파장 및 구조의 무질서도에 의해 결정됨을 밝혀냈다.
이와 함께 평균산란거리와 Ioffe-Regel factor를 분석해 광자 띠꼬리 상태가 발현되는 기저 원리는 결정구조에서의 앤더슨 국지화임을 밝혔다. 또한 광자결정 합금계의 경우 무질서도에 관계없이 결정구조가 유지되기 때문에 광범위한 광학적 특성에 대한 제어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기존 연구들은 빛을 제어하기 위한 무질서 광학계의 설계에서 결정구조의 중요성이 간과돼 왔습니다. 이에 연구팀은 그 중요성을 인지하고 구조적 자유도를 충분히 보장하면서도 체계적인 무질서의 설계가 가능한 광자결정 합금 구조를 도입했습니다. 이로부터 새로운 광자학적 고유상태인 띠꼬리 상태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입증함으로써 향후 이를 이용한 빛의 인위적 제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광자결정 합금은 개별 격자점에서의 산란강도를 독립적으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광학계를 픽셀단위로 설계할 수 있고, 이에 따라 광학적 특성에 대한 제어가 체계적이고 용이하다. 그리고 광자결정 합금계의 고유상태인 광자 띠꼬리 상태의 경우 넓은 범위에서 공진 파장과 전자기장 집속도를 제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연구를 통해 광범위한 에너지 영역의 빛을 넓은 시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제어하는 기반 기술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또한 본 연구를 통해 광자 띠꼬리 상태는 일반적으로 매우 우수한 공진특성을 갖고 있음을 증명했으며, 이는 광자 띠꼬리 상태에서 발진하는 나노레이저, 즉 무작위레이저(random laser) 개발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향후 빛의 공진특성을 이용하는 초소형 레이저, 광섬유, 광메모리, 태양전지, 포토다이오드 등 여러 광소자들의 성능을 개선하고 새로운 기능성을 부여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창의적 사고가 세상을 바꾼다
전헌수 교수의 최근 연구성과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뛰어 넘는 획기적인 기술로 평가받으며 과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실제 산업에서의 응용 가능성도 무한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산업계의 관심 또한 높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그동안 인내와 노력으로 일궈낸 전헌수 교수의 지난 세월과 땀이 녹아 있다. 무엇보다 기초와 응용을 넘나들며 기존 생각의 틀을 벗어난 창의적인 사고와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헌수 교수는 연구원들에게도 항상 고정관념을 깨는 창의성이 있어야만 연구가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연구는 항상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고, 다각적인 시각에서 접근해야 하는 일입니다. 연구가 현재보다 진일보하기 위해서는 남들과 다른 발상을 해야만 가능한 일이죠. 창조와 융합이 강조되는 현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더욱 깨어 있는 열린 사고가 필요합니다.
그런 만큼 틀에 박힌 모범생 보다는 다소 엉뚱하더라도 독창적인 사고와 도전정신을 가진 인재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연구를 하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인격적인 성숙이 기본이 돼야 하겠죠.”
전헌수 교수는 연구원들에게 큰 그림을 그려주고 총괄 디렉터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동시에 그들이 스스로 각자의 역량을 발휘해 최선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특히 틈나는 대로 실시하는 ‘데일리 체크’는 전헌수 교수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하나의 중요한 코드라고 할 수 있다. 즉, 큰 그림을 그려주되 연구원들이 각자의 능력과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장을 열어두고, 의견교환을 통해 스스로가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연구원들과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들에 대해 수시로 체크하는 시간을 가지며 의견을 나누고 있습니다. 연구실을 이끄는 리더가 키를 잡고, 연구원과 직접 소통하며 함께 이끌어 나가는 게 연구가 목적지까지 순항할 수 있는 가장 큰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연구실 규모를 무리해서 늘리지 않고, 제가 직접 챙길 수 있는 선에서 유지하는 편입니다.”
전헌수 교수는 그동안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 이제 교육과 연구에 대한 그림이 확실하게 그려졌다며 연구자로서, 교육자로서 완숙미 있는 10년을 만들어 갈 계획임을 밝혔다. 무엇보다 개발한 기술과 소재들이 실제로 사용됨으로써 ‘인류의 삶에 도움이 되는 연구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언제나 긍정의 힘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끌어 온 전헌수 교수, 그가 만들어 갈 10년이 다시 한 번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열쇠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이 기사는 사이언스21 매거진 2018년 6월호에 게재 되었습니다.>